사람이 나이가 들면 뿌리를 찾기 마련이다.
아버님에게 막연히 들었던 조각난 성씨 유래에 대해
항상 궁금증과 부족함에 목말라 했었는데....
올 초 경북안동 안동옥션에서
우연히 능성김씨 족보가 경매에 의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낙찰자를 찾아보려 했으나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상에서도 가끔 능성김씨에 대해 물어보는 네티즌이 있어
경매당시 올라온 사진을 근거로 능성김씨 내력을 올리니 시조에 대한 목마름을
이것으로 우선 축이시길 바란다.
(혹 시간이 지나 인연이 있어 족보를 손에 넣을수 있기를 기대하며..)
綾城金氏族譜序
金氏族譜譜金氏之族也 惟我東國之金出自大輔公而子孫蕃衍三十餘世之間聖子神孫或爲王或爲卿至于末王敬順公諱傳爲三韓之明主也 有公子八人分封貫鄕則環左海洪域皆爲金姓之派祖而第五子義城君諱錫之八世孫諱龍弼仍義城金族之派祖也 噫我綾城之金昔爲義城之同派今爲綾城之異貫者 盖有原焉 請擧其槩而言之 我中始祖諱則東公自義城遷居綾城憂卉寇之變因北遷于咸鏡道永興邑西數百里之外橫川面落鴈峯下而伐木爲田鑿山通道陶復陶穴 如周太王之去◯遷岐也 新開拓之地麻衣草食與木石居同鹿豕遊其所中葉不可勝言 然而尙有先祖主積德累仁之報風氣日開雲仍日衆始籍于此因以綾城爲貫云
김씨 족보는 김씨의 계통을 계보한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동방의 김씨는 대보공으로부터 자손이 번연하여 30여대간 성자, 신손이 혹은 왕이 되기도 하고 재상이 되기도 하다가 마지막 경순왕 휘 전이 삼한의 영명한 군주가 되었다. 경순의 여덟 아들은 관향을 분봉받아 좌해와 넓은 영역을 둘러 김성의 파조가 되었는데 제5자 의성군 휘 석의 8세손 용필이 바로 의성김씨의 파조이다.
오호라! 우리 능성김씨는 옛날 의성김씨와 같은 파이다가 지금 능성으로 관향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의성김씨)에 근원이 있다. 그 대략을 들어 말하면 우리 중시조 직동공께서 의성에서 능성으로 왜구의 변란을 우려하여 옮긴 것이다. 북쪽으로 함경도 영흥읍 서쪽 수백리 외곽에 위치한 횡천면 낙안봉 아래 벌목하여 밭을 일구고 산을 뚫어 길을 만들고 도자기를 구운 것인데 마치 주 태왕이 난을 피하여 ◯◯로 갔다가 기산으로 옮긴 것과 같다.
새로 개척한 땅에서 마의초식하며 산수와 더불어 사슴, 돼지를 기르며 생활 했으니 그 사이의 고통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하나 아직도 적덕누인의 보답이 있어 풍기가 날로 펼쳐져 비로써 이곳으로 관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로써 능성으로 관향을 삼은 것이다.
其先義城人也則若孔夫子之居魯而其先宋人也 這間衰徵推此可知三四代獨身卜居于此者 至今爲數十餘代而後裔之所居于此者 亦爲二三百家 尙不改其本者 古之聖人皆以所居地爲氏者多而因循不服也
그 선조가 의성인이라는 것은 공자가 노나라에 거처하였지만 그 선조가 송나라 사람이라는 것과 같다. 그동안 쇠잔되었음을 이것으로 미루어 가히 알 수 있다. 지금은 수 십 여대가 흘렀어도 후손들이 이곳에 거처하는 바가 되었다. 또한 2-3백가가 되어 여전히 그 본향을 고치지 않고 있다. 옛 성인들도 모두 거처한 곳을 가지고 성씨로 삼는 법이 많은데 그대로 따라서 고치지 않는 것이다.
上以遠聖明世敎化之源 下以乏鄕先生導迪之功 必有才德魁梧寧不恥之人出其間 或事武威而名登虎榜 籍纓不繼則只有承武之慣寧不恥于開國佐命功臣之宗祖乎 或操文墨而未叅桂籍功名不遂則尙無傳道之源 亦不恥于慕齊思齊之道祖乎
위로는 멀리 광명성세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고, 아래로는 선생이 잔약한 고을의 선생의 선도의 공으로서 반드시 재덕과 훌륭한 풍채가 있어 어찌 아니 부끄러운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오겠는가? 혹시라도 무위에 종사하고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단지 무만을 숭상하는 관습이 있어 어찌 개국좌명공신이신 종조에 부끄럽지 아니하겠는가? 혹은 문묵을 잡고도 과거에 오르지 못하여 공명을 따르지 못한다면 전도의 근원이 없는 것 역시 흠모하는 도조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더냐?
嗚呼 十一代祖諱應環應秀兄弟 連璧虎榜 名聞當世 未有顯職 七代祖諱先白早事文學旌卽投筆 高叅虎榜令聞亦暢 吾六代祖諱是冑早登武甲官至嘉義大夫中樞副使 父祖曾三代追贈用公之貴族 祖諱贊冑一登武科四紀入朝官至龍驤累經節除 又當回榜肅拜后 正廟朝特賜以資憲大夫之職 傳敎內金某回榜到門自方伯以下各邑守令看事云 無忠心然歟 享年九十而卒可謂三達尊也
오호라! 십일대조 휘 응환, 응수형제는 나란히 과거에 오르고 당세에 이름을 떨쳤는데 현직에서는 아직 없는 일이다. 7대조 휘 선백은 일찍이 문학에 종사하다가 공부를 마치고 과거에 높게 합격하여 영예와 명성이 휘날렸다. 나의 육대조 휘 시주는 무과에 올라 관직이 가의대부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부,조,증조 삼대가 공이 귀하게되어 모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찬주인데 단번에 무과에 급제하여 입조한지 4기(1기 12년) 만에 관직이 용양위대장군에 오르고 누차 절제사를 지냈다. 또한 회방(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해)때 임금에게 숙배하니 정조가 특별히 자헌대부를 특사하였다. 전교가운데 김모가 회방 때문에 도착하니 관찰사 이하 각 읍 수령이 만나 보았다고 한다. 충심이 없다면 그러하겠느냐! 향년 90에 졸하니 가히 삼달존(나이, 벼슬, 덕)이라고 이를만하다.
族高祖諱聲穆武勇超世名叅武科行乾源鎭權官 族祖諱夏重文學有餘才德兼全投筆及武行朔州幕嶺鎭萬戶之任 文以治內武以禦外則出將入相
고조 휘는 성목인데 세상을 초월하는 무용이 있어 이름이 무과에 끼여 건원진 권관 되었다. 조 휘는 하인데 문학을 중히 여기고 재덕을 겸비했는데 문필을 그만두고 무과에 급제하여 삭주 막령진 만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으로서 안을 다스리고 무로서 바깥을 방어하니 외방에 나가면 장수로 나가고 들어오면 재상.....이하 빠진 쪽이 있어 문맥이 맞지 않음
至於數十代分爲二三百戶則豈非源深而流原根 固而枝茂乎 然則先祖積累之德後孫昭穆之序若不筆之於譜而徙然授之以口則昧於某派之祖某祖之孫至於道人之歸 故自宗中別立公議以成一家之譜牒留作後孫之龜鑑也
수 십대에 이르러 2-3백호로 나뉘었다면 어찌 근원이 깊지 않고 뿌리가 길지 아니하겠느냐? 진실로 가지가 무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가 쌓은 덕, 후손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족보에 적지 아니하고 입으로만 전해준다면 某派의 조, 某祖의 손, 세상의 도의와 인심이 귀결될 때 까지 어리석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중별로 공론을 거쳐 한집안의 보첩을 만들어 후손의 귀감이 되도록 남겨야 할 것이다.
如斯而後 加知某先祖之本支 某子孫之名字 而不至於換父易祖以叔爲弟之失 則彛倫有敍懿德是好孝悌之心油以生親睦之情 不言而信矣
盖斯譜也 實孫之述斯之以孝爲本者也 以余不肖粗知文字聊忘蔑劣踵成譜序壽 傳于後世而先祖之所由後孫之所由分開卷瞭然 嗚呼 凡吾同譜之族誰至於百代之遠而視之如一家之親則遠者不遠親者益親而其於以孝孫述之無或絶縷而勉哉
이와 같은 후에 어느 선조의 근본 줄기와 어느 자손의 이름을 가히 알 수 있어 부가 조로 바뀌고 숙부를 동생으로 여기는 잘못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이륜(법도와 윤리)이 질서가 잡히고 아름다운 덕은 효제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여 친목의 정이 생기어 말하지 않아도 믿게 되는 것이다. 대략 이것이 족보이다. 실제 자손이 기술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효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다.
내가 문자를 대강 알고 잊기를 잘하고 하찮으나 거듭 족보를 서술하여 후세에 전하여 선조가 어째서 그런지 후손이 어째서 그런지 이로부터 분명해져 책을 펴면 일목요연해 질 것이다. 오호라! 무릇 내 같은 족보의 족친으로 누구라도 100대 멀리 이르더라도 그것을 보이면 한집안 친척 같고 먼 사람도 가깝고 친한 사람은 더욱 친하게 되니 효손으로써 그것을 기술하는데 있어 혹시라도 끊어지지 않도록 힘쓸 것이다!
綾城金氏族譜跋
夫族之有譜也 盖常矣 爾雅釋木本是木之譜也 釋草之草之譜也 以至釋鳥釋獸釋虫釋魚 莫不以同族爲譜者也 然則人爲萬物之最靈而其有宗族之譜不待贅論而知者也 惟我金姓之氏族 冠於東方 而其源盖出乎新羅大補公也 請擧其槪而論之 今吾綾城之族奧自義城之後遷于綾城 而因以其所居地爲貫焉 嗚呼 金氏子孫本支相繼而至于中始祖禦侮將軍諱則東公始卜居于永興邑西橫川之地而子孫之所居者 甲於一方故世稱人傑之宗 而所慨然者 尙無譜牒故也
대저 종족에게는 족보가 있는 것은 대개 상식적인 일이다. 유교경전 이아의 석목조를 보면 나무의 계보이고 석초는 풀의 계보이다.
석조, 석수, 석충, 석어에 이르기까지 동족을 계보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만물의 가장 윗자리에 잇는 영장으로 씨족마다 족보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알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김성의 씨족은 동방의 으뜸이며 그 근원이 신라 대보공에서 비롯되었다. 그 대략을 들어 논하면 우리 능성은 의성의 후손으로 능성으로 옮겨가서 그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호라! 김씨 자손 본줄기가 서로 이어지다가 중시조 어모장군 칙동공에 이르러 비로소 영흥읍 서쪽 횡천 땅에 자손들이 거주하게 된 것이다. 한 방면에 으뜸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인걸의 우두머리라고 불리었는데 개탄스러운 것은 아직도 보첩이 없다는 것이다.
塵笥間誰有一二私承然年代無甲乙之序宗族昧雖某之別爲覽者未免迷津之澤暵 故昨乙卯宗中諸公公會協議 收單成秩將付于剞劂以壽苗裔 斯譜也 上以明鼻祖績累之德 下以效耳孫繼述之孝 曷不休哉 噫 余亦先祖之一介孫其自髫齡 受家庭之訓粗解文字 斯譜之成 不可無一辭奉賀 故聊忘拙劣累綴文字以足篇尾難容猥越 然於系宗親族之道豈不無小補也哉 遂爲之
開國五百二十五年 丙辰春三月戊寅 不肖孫 金相敏麒述 謹跋
大正五年四月二十二日
묵은 상자 안에 어느 한 두 사람이 사사로이 받들고 있을런 지는 몰라도 년대가 갑을의 서열이 없어 족친 중 아무 모가 따로 열람하였다 하더라도 어느 나루를 건너야 될지 모르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해 우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을묘 년 종중의 여러 공들이 공회에서 협의하여 명단을 수집하고 차례를 만들어 인쇄를 맡기어서 후손에게 전하려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족보이다.
위로는 비조의 쌓인 덕을 밝히고 아래로는 자손들이 효행을 이어 받아 본받게 하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더냐? 오호라! 나 역시 조상의 일개 자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가정의 훈육을 받아 문자를 대강 풀이하니 이 족보를 완성하는데 한마디 받듦도 없다면 옳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잊기를 잘하고 졸렬하나 편철함에 있어 책 말미에 발문을 보충하니 외람되이 분수에 넘치는 것 같아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종족과 친족을 잇는 도리에 있어 어찌 조그만 보탬도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그것을 따랐다.
발문 : 책의 끝에 본문(本文)의 내용(內容)의 대강이나 간행(刊行)에 관계(關係)되는 사항(事項)을 간략(簡略)하게 적은 글
大正五年(1916년), 원산인쇄소
현재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능성김씨에 관한 자료검색결과
한국학 자료센터(아래사진) 만가보에서 능성김씨(綾城金氏)를 찾았다.
김명하(金鳴夏)
본관 : 능성김씨(綾城金氏), 족보기록(子)鳴夏, 과거 : 숙종 을해,문과
관력 원문위치 만가보 : 6 책 22 면 (좌측) 4 단 1 행
김명은(金鳴殷)
본관 : 능성김씨(綾城金氏), 족보기록(子)鳴殷, 과거 : 정묘, 문과
관력 원문위치 만가보 : 6 책 22 면 (좌측) 4 단 2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