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 발굴 개요
1993년 10월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소재한 '단군릉'의 발굴 사실이 발표되었다.
“단군은 오늘의 평양에서 나라를 세운 후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점차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이후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근 3천년 동안 전속하면서 멀리 중국의 만리장성 계선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아시아의 강대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단군이 죽어 묻힌 곳도 역시 평양 일대였다" 이 글은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의 내용(93.10.2)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단군릉은 돌로 무덤 칸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이른바 굴식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었다.
크기는 동서 273cm, 남북 276cm의 작은 무덤으로 네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고 하며 모줄임 천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덤양식은 5세기 이후 고구려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이다.
여기서는 해방 전 일제에 의해 도굴되어 많은 유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금동관, 금동허리띠장식, 고구려토기편, 관못 6개,
남녀 두 사람의 인골(남자 170cm 이상)이 출토되었고 인골에 대한 연대측정(E.S.R측정법=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법)을 한 결과 1993으로부터 5011±267년(오차 5.4%)전의 연대치가 나왔다.
즉 기원전 3018±267년의 뼈임이 확인되었고 이 인골은 단군과 부인의 뼈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왜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시기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점과
기원전 3,000년경의 인골이 어떻게 단군의 뼈임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시기에 단군 숭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어
단군의 무덤을 당시의 무덤양식에 맞추어 새로 단장했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 당시에 금동관을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단군 외에는 다른 인물이 없다는 논리이다.
(측정방법, 정치적 이유, 문헌기록)
'소방에 대하여 > 강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방법 소개 (0) | 2010.04.24 |
---|---|
우리나라 문헌상의 불의 사용 (0) | 2010.04.24 |
불과 국가간의 전쟁 (0) | 2010.04.24 |
천방사와 소정방의 전설 (0) | 2010.04.24 |
준비한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 (0) | 2010.04.24 |